나라 망할 뻔 했습니다

10월 하순 국가정보원이 장민호 씨 등 일심회 사건 관련자들을 차례로 구속한 이후 이 사건을 둘러싼 최대 논란은 조직적인 간첩사건이냐, 아니냐였다.

장 씨 등의 기소를 앞둔 검찰이 구속자 5명 전원에게 이른바 ‘간첩 혐의’로 불리는 국가보안법 제4조 2항(목적 수행)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번 사건의 성격을 조직적인 간첩사건으로 규정한 셈. 앞으로의 재판 과정에서도 검찰과 구속자들 간에는 이 부분을 놓고 치열한 법정다툼이 벌어질 전망이다.

○ “5명 모두 국가기밀 북에 제공”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송찬엽)는 국정원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지난달 10일 이후 30일간의 수사를 통해 구속된 5명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국가기밀을 북측에 전달한 혐의를 밝혀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훈(42·구속) 씨 등 4명은 주로 각자 수집한 기밀을 개별적으로 장 씨에게 보고했고, 장 씨가 이를 북한 공작원에게 건넨 것으로 검찰은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장 씨를 제외한 4명은 이 같은 혐의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검찰 수사팀 10여 명은 4일 내부 토론 과정에서 장 씨뿐 아니라 나머지 4명에 대해서도 국보법 제4조 2항을 적용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국정원은 장 씨 등을 체포해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까지만 해도 장 씨를 제외한 4명에 대해선 국보법 제8조(회합 통신) 위반 혐의만 적용했다. 장 씨의 주선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촉했다는 정도였다.
이때만 해도 장 씨 역시 국보법 제6조(잠입 탈출)와 제8조 혐의만 적용됐다.
그래서 이들이 구속된 직후 김승규 당시 국정원장이 ‘간첩단’ 사건이라고 규정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또한 후임 국정원장으로 지명된 김만복 신임 원장은 지난달 20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간첩단으로 규정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부적절하다”고 답변했다.
개별적인 간첩 혐의는 밝혀냈으나 이들 5명이 조직 체계를 갖추고 간첩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검찰의 보강수사를 통해 일심회는 간첩 혐의를 받는 일정한 조직 체계인 것으로 결론이 났다.

○ 일심회는 단선-복선 혼합형 조직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일심회 조직 체계는 기존 조직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새로운 유형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의 조직망은 단선이나 점 조직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선 연계 조직은 상하 조직원 간에 일직선으로 연결돼 있으며, 두 단계를 건너뛰면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일심회는 이 같은 단선 연계 조직에, 일부 조직을 은폐한 ‘복선포치형’이 혼합된 형태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핵심 인물인 장 씨를 정점으로 4명의 조직원이 같은 ‘층’에 배열돼 있고, 이들 4명은 아래에 각자 접촉 대상을 거느리고 있는 형태다. 전체적으로는 피라미드 형태로 상하 간에 종적 연계는 있지만, 같은 ‘층’에 있는 조직원 간에 횡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다.

장 씨를 제외한 4명은 각자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모아 개별적으로 장 씨에게 보고했고, 장 씨는 이를 모아 북측에 건넸다는 것. 이는 이미 구속된 5명 외에 추가 연루자가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독특한 조직구조를 갖춘 탓에 장 씨는 다른 구속자 4명에게서 개별적으로 정보를 건네받더라도 이 정보를 최초로 제공한 추가 연루자가 누구인지 잘 모를 수 있다는 게 공안당국 관계자의 설명이다.

검찰과 국정원은 압수한 증거물에서 정치권 및 시민단체 인사 여러 명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장 씨에게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일심회에 하부 조직원이 존재했는지, 압수물에 등장한 인사들이 하부 조직원이었는지는 국정원이 계속 내사 중이다.

●압수수색 며칠만 늦었어도…

“며칠만 압수수색이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일심회’ 사건을 수사한 공안당국 관계자의 말이다.

국가정보원은 10월 24일 일심회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장민호(44) 씨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장 씨가 평소 사용하던 휴대용 저장장치인 USB 4개를 확보했다.

컴퓨터 파일 복원 전문가와 암호 해독 전문가를 총동원해 USB에 저장된 파일을 열어본 공안당국은 깜짝 놀랐다. 각 USB에 수백∼수천 건의 대북(對北) 보고 문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

장 씨가 조사 과정에서 “며칠 뒤 USB를 폐기하려고 했다”고 진술했을 때 수사팀은 한 번 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처음에 혐의를 전면 부인하던 장 씨는 이 문건을 근거로 추궁하자 조금씩 시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USB에 저장돼 있던 문건을 근거로 장 씨 등 5명이 국가기밀을 탐지 누설한 결정적 단서가 확보됐고, 장 씨 등에게 이른바 간첩혐의인 국가보안법 4조 2항을 적용할 수 있었다.

국정원이 USB와 함께 압수수색한 수만∼수십만 건의 문서보다도 5cm 안팎, 단 몇 g의 초소형 USB 4개가 수사팀에는 결정적 단서가 된 셈이다.